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12월 1일, 변화된 양상 === 사상자의 증가는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하갈우리의 사단의무대에서 후송되어 좀 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부상자는 6백 명에 달했다. 유담리에서도 부상병이 적어도 5백 명은 있을 듯하였다.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부상자를 항공수송하는 것뿐이었다. 이에 공사가 절반도 안 끝난 야전활주로에서 C-47 수송기 1대가 시험 착륙하였다. 관제탑은 무전기를 탑재한 지프가 대신하였다. 활주로가 짧아 엔진을 역회전 시키는 위험한 착륙이었다. 다행히 착륙에 성공하고 30분 후 부상자 24명을 태우고 이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지상에 있던 전 병력은 그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바로 이 비행장이 '''전멸을 막았다.''' 그동안 하갈우리의 방어선이 공격받는 극히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해군공병대만은 열외되어 적의 포화에 노출될 위협을 감수한 채 불 켜놓고 밤새도록 작업하였고, 마침내 부분적으로나마 활주로 개통에 성공한 것이다. 부상병들이 후송되는 것은 물론 [[함흥]]·[[흥남]]·[[원산]]에 있던 해병대 행정부대원과 부상에서 회복한 병력 500명이 보충병으로 기꺼이 이 지옥의 한복판으로 날아왔다. 아침 8시, 유담리의 7연대의 남은 2·3 대대가 전차 한대를 앞세우고 하갈우리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7연대 2대대에 있던 D, E중대는 작살이 나 있는 상태여서 D-E중대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채 5연대 3대대로 배속되었고, 12월 27일 가장 먼저 괴멸된 7연대 3대대 H중대는 20명 남아있었다.] 이는 하갈우리에서 도로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유일한 M-26 퍼싱 전차였다. 비록 철수하지만 해병대의 사기는 살아있었는데, “흥남으로 돌아가 재편성하고 다시 돌아와 중공군에게 진짜 매운맛을 보여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있을 정도였다. 뒤이어 5연대도 출발하였는데, 가장 후방에 있던 5연대 1대대가 후퇴하면 바로 뒤따라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다. 포병을 동원하여 겨우 적의 전진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5연대에서 각 중대별로 “너무 힘들어 현 진지를 사수하겠다”고 요청하였지만, 연대장은 모두 거부하고 “무조건 하갈우리를 향하여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유담리에서 후퇴할 때 불도저로 180cm 정도로 기다란 구덩이를 파고 낙하산 천에 싸인 시신 85구를 합동으로 묻었다.[* 적지에 가매장하고 후퇴한 것은 [[미 해병대]] 역사상 5번 이내에 드는 사례이다.] 그리고 존 크래번 [[군종 목사]]가 [[성경]] 구절을 낭독하면서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다행히 휴전 후 별도의 회담을 통해 모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제는 장진호 동안의 육군이었다. 풍유리의 페이스 대대장이 이끄는 31연대 3대대를 중심으로 한 페이스 부대는 전날의 야간 전투를 겨우 막아내었지만, 새벽녘에는 일부 방어선이 뚫려 북동쪽에 있는 감제고지가 점령되었다. 중공군은 이날 이례적으로 주간 공격을 하였다. 아침 9시. 페이스 중령은 유일하게 통신 가능한 항공 무전으로 조종사에게 "우리 부대와 하갈우리 사이에 아군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조종사는 "죄송합니다. 없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래도 조종사는 '기상만 허용하면 정오쯤에 콜세어 1개 편대를 안내해오겠다.'고 하였다. 또한 57포병대, 31박격포중대, D방공포대 모두 아주 적은 탄약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후퇴 순서는 32연대 1대대(C, B, D, A중대 순), 57 야전포병대대,[* 57 포병대가 전날 먼저 철수했다는 자료도 있는데, 전날 철수한 건 57 포병대 대대본부이다.] 중박격포중대, 31대대 3대대(T소총중대인 I, K, L 중대가 작살나 있어 K중대로 통합되었다) 순이며, 15대공포 대대 D포대의 반궤도 차량은 대열 중간중간에 배치했다. 57포병대대와 31중박격포중대는 철수 직전에 남은 탄약을 지원 사격에 다 소모한 다음 포신과 포강을 파괴하기로 했다. 무전과 기관총이 있는 차량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파괴하기로 했다. 태워야 할 부상자가 너무 많아 사전에 트럭에 실어놓은 시신들을 트럭 밖으로 던져버렸고, 시신들은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졌다. 각 차량에는 부상자 15명 내지 20명을 실었는데, 3단으로 50명을 실은 트럭도 있었다. 부상자 600명을 포함하여 육군 병력 수천 명은 코르세어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풍유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총 14마일을 남하해야 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탈출로는 남쪽으로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데, 오른쪽부터 장진호-도로-철길-능선이었다. 1221고지 근방에서서는 철길과 도로가 교차되어 오른쪽부터 장진호-철길-1221고지-도로 순이었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 장진호-철길-도로-능선으로 지형이 바뀐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좌측 방향만 방어하면 되었다. 보병들은 능선으로 배치되어 계속 후속 부대가 선두 부대를 인수받는 식으로 방어진을 펼치고, 차량 행렬은 도로를 따라 이동하기로 하였다. 얼어붙은 장진호를 건너가는 방법도 논의되었지만 빙판이 7~8마일의 거리 동안 다수의 부상자를 실은 2.5톤 트럭을 버텨줄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후퇴 중에 [[모랄빵]] 난 32연대 3대대 K중대가 시도해봤다가 얼음이 깨져 다수가 익사하였다. 이윽고 1시가 되자 [[F4U 콜세어|코르세어기가]] 나타났고 병력은 출발하였다. 최선두와 최후미는 최강의 화력인 듀얼-40[* 보포스 40mm 대공포를 2연장으로 탑재한 차량. 전차가 아니고서야 버틸 수가 없는 화력이었다.]이 맡았다. 쿼드-50[* .50구경 M2중기관총을 4정 장착한 장갑차량. [[M16 하프트랙|M16 미트쵸퍼]]라는 이름으로 유명했고 보병 상대로는 MG42는 따위로 만들만큼 지옥을 선사했다. 그리고 중공군의 주력은 보병이었기에 매우 쏠쏠했다.] 2대는 중간에 섞여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이후 1221고지를 통과하기 전에 탄약과 연료가 모두 떨어졌다. 31대대 3대대 M중대 같이 일부 부대에는 철수 명령이 전달되지 못해 이동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섞여 들어왔다. 이때 모든 포병과 박격포는 탄약을 소모하기 위해 급속 사격을 하였다. 선두는 듀얼-40과 31연대 1대대 C중대 3소대가 맡았고, 바로 뒤에 페이스 중령과 항공지원장교 스탬포드 대위가 위치하였다. 이때 출발 지점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A중대가 합류를 위해 C중대를 향해 달려왔고, 그 틈을 타고 중공군들이 뒤를 따라 공격해왔다. 그걸 본 공중에 있던 콜세어기가 네이팜탄을 떨어트렸는데, 차량 바로 앞쪽에 떨어져 일부 병사들이 불기둥으로 변하였고, 눈밭을 구르며 제발 총으로 자신을 쏴달라고 애원하였다. 증언마다 다르지만 미군은 15명가량이 타 죽었고, 중공군은 40명 남짓이 죽었다. 공포에 휩싸인 병력들은 도로를 따라 무질서하게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건재하였던 소대, 중대간의 편제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선두에 있던 페이스 중령이 권총으로 위협하거나 명령하고 타이르며 병력들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페이스 부대는 결정적으로 사기가 꺾이기는 했지만, 콜세어의 지속적인 주변 폭격은 다시 사기를 올려주었다. 또한 폭격 과정에서 [[아군 오사|몇몇 미군과 장갑차가 휘말렸지만]] 어쨌든 네이팜탄이 적의 돌격도 막아내었다. 그날 10군단장은 가용 가능한 항공자원 중 절반을 장진호 동안에 배정하였다. 20대의 항공기를 배정받았고, 4대 또는 6대씩 교대로 와서 기총소사, 로켓 공격,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막강한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정작 지상에 있던 육군은 싸울 의지가 부족하였다. 능선을 따라 이동해야 할 병사들이 계속 도로 쪽으로 몰렸다. 행군대형도 무시되어 선두의 C, A중대가 뒤섞였고, 더 이상 이들을 지휘할 장교를 찾기 힘들었다. 후방 방어는 K 통합중대와 또 1대의 듀얼-40이 맞아야 했지만, K 중대는 능선을 따라 이동하며 방어하는 대신 적의 총탄을 피해 우측으로 이동해 안전한 빙판을 따라 이동하였고(대신 다수가 얼음이 깨져 익사함), 듀얼-40은 기름을 아끼기 위해 시동을 끈 상태로 최후까지 방어 사격을 하다가 순서가 되어 출발하려고 하니 배터리가 방전되어 할 수 없이 버려졌다. 또한 차량 행렬이 집중 사격을 받아 차에 타고 있던 부상병들은 두세 번씩 추가로 총상을 입었고, [[운전병]]들이 계속 죽어나갔다. 이 때문에 운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라, 대체할 지원자를 찾기 힘들었다. 부상자는 계속 늘어났지만 이미 트럭에 부상자로 가득 차서 더 이상 태울 수가 없어, 기존에 있던 부상자가 내리기도 했지만 새로 발생한 부상자는 그대로 버려지기도 했다. 이런 악전고투 속에 2시간 동안 2마일 남하하여 15시에는 1221고지 근처까지 이동할 수는 있었다.[* 근무포대의 경우 15명이 출발하여 1마일 남하해 4일 전인 27일 밤에 주둔하던 진지를 지나가는데, 그때까지 멀쩡하게 걸어가는 병사는 단 3명 남았다. 100명으로 시작해 4일 동안 단 3명 남은 것이다.] 이때서야 4일 만에 처음으로 포병관측반 지프 탑재 무전기로 상부의 지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용이 "페이스 중령 앞. 하갈우리로의 퇴로를 스스로 확보하라. 귀관을 지원하기는 불가능하다. 스미스 해병 제1사단장 서명."으로 절망적인 메시지였다. 심지어 1221고지 옆의 다리가 폭파되어 있어서 차량 행렬이 막혀버렸다. 가장 큰 문제는, 16시에는 해가 지기 시작하여 항공 지원이 끊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끊어진 다리를 넘을 수 없으니 얼어붙은 늪지로 우회하여 듀얼-40 궤도 차량이 먼저 건넌 후, 일반 트럭을 케이블로 견인하는 방식으로 도섭하였다. 도섭 중인 트럭은 좋은 표적이었는데, 운전병이 저격당해 대체 운전병을 찾을 때까지 일정이 지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후위를 32연대 3대대 통합 K중대가 맡았지만, 장교들마저 자신의 위치를 버리고 오히려 먼저 강을 건너 도망쳤다. 결국 여기서만 2시간을 허비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 주로 여자와 아이들로 구성된 한국인 피난민 100여 명이 곳곳에서 합류하였다. 일부 병력은 1221고지를 공격하다가 그냥 고지를 넘어 도로를 따라 후동리 방향으로 남하하였다. 일부 병력은 1221고지를 우회하여 장진호의 빙판을 건너 하갈우리로 가기도 하였다. 많은 카투사들이 1221고지 공격에 가담했는데, 한 카투사는 혼자서 중공군 16명이 지키고 있는 벙커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도 대열 후미에서는 아직도 끊어진 다리를 건너고 있는 등 아수라장이었다. 너무 많은 부상자들이 차량에 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도로를 개척해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후 5시경 페이스 중령은 필사적으로 병력들이 다시 싸우도록 지시를 내렸지만 모두 넋이 나가있었다. 페이스 중령은 전투를 거부하며 트럭 짐칸에 스스로 묶으려고 했던 [[카투사]] 2명에게 싸우라고 지시하였는데, 그들은 [[일본어]]로 "나는 다쳤습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하였다. 이에 페이스 중령은 둘 다 사살해 버렸다. 정작 이 와중에 훨씬 많은 훈련을 받고도 도망치는 미군은 1명도 쏴죽이지 않았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후퇴하는 아군 병력을 쏴 죽이는 것은, 한 번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6.25 전쟁]] 첫날에 방어전이 내던져졌던 생도 1기생이 후퇴하던 입학 4일차 생도 2기생을 쏴죽이기도 하고, 살인 장군으로 악명 높은 [[백인엽]] 장군은 병사들을 쏴 죽이는 것이 일상사였다. 전부 부족한 지휘력을 공포에 의해 병력을 통제하려는 것이었고, 결과는 실패였다. [[6.25 전쟁]]의 다른 사례를 보면 부하에게 권총을 쥐어주고 "내가 후퇴하면 나부터 쏴라!"라고 하고 앞장서서 돌격하는 [[백선엽|바로 위의 백인엽의 형]] 같은 장군은 승리하였다. "나는 뒤에 있을 테니 너부터 돌격하라."면서 부하들을 쏴 죽이는 지휘관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 페이스 중령과 다른 장교들의 계속되는 독전으로 1221고지는 완전히 장악된 것은 아니지만 대충 정리되었다. 이어 1221고지 아래에 도로에 있는 도로장애물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개별적으로 숨어있던 중공군 1명이 [[수류탄]]을 던져 그 파편이 페이스 중령의 가슴에 맞았다.[* <아웃 브레이크>에는 "도로장애물을 개척하기도 전에 선두차량 2대의 [[운전병]]이 죽어 대열이 정지되었고, 이어서 페이스 중령의 가슴에 총을 맞았다"고 되어 있다.] 이동을 시작하자마자 2번째 도로 장애물이 나타났다. 며칠 전 북상하다가 실패했던 31전차 중대의 파괴된 전차 중대 2대와, 전멸당한 의무중대의 불타버린 차량들, 그리고 통나무들로 도로장애물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선두 차량 그룹은 도로 장애물을 치웠고, 뒤따라오던 로버트 존스 소령을 중심으로 일부는 도로 대신 인접한 철길을 따라 남하하였다. 어쨌든 출발할 때 35대였던 차량은 이제 약 25대 남았다. 각 차량에 적게는 10~15명, 많게는 3단으로 쌓여서 부상자 4~50명이 타고 있었다. 경상자들은 차량 외부에 매달렸다. 2번째 도로 장애물을 개척하고 이동하니, 이번에는 2번째 끊어진 다리가 나왔다.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여기서 차량 대열은 가까이 있던 철로에 있던 구각교를 이용하여 우회해서, 끊어진 다리 남쪽 도로로 올라왔다. 철로에 있던 구각철교는 다행히 멀쩡하였다. 길이 미끄러워 이 우회 과정이 쉽지 않아, 여기서도 많은 시간이 낭비되었다. 결국 후동리에 도착한 21시 무렵에는 남아있던 차량은 15대에서 20대 가량이었고, 부상병 150명 정도가 함께 행군 중이었다. 가슴에 세열수류탄 파편을 맞은 페이스 중령은 차량행렬 선두 트럭에 실려 있었다. 중간중간 장교들을 만나 누운 채로 지휘하기는 했지만, 부상이 너무 심해 그날 밤 사망하였다. 차량 대열은 마침내 후동리로 들어왔다. 원래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31연대 본부와 31전차중대만 남아 있었다면, 함께 힘을 합쳐 뚫고 내려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동리 부대는 전날 철수한지라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후동리에 도착하자마자 중공군 사격에 차량 운전병이 전사했고, 그렇게 트럭이 전복돼 부상병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차량 행렬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선두 차량은 엑셀레이터를 밟아 홀로 떠났고, 걸을 수 있는 병사들은 모두 흩어졌다.[* 선두 차량에는 페이스 중령이 실려 있었는데, 후동리를 탈출한 유일한 차량이었다. 이 차량은 후동리 남쪽 2.5마일 지점, 하갈우리 북쪽 1.5마일 지점 고갯길에서 아마도 휘발유가 떨어져, 운전병은 차량을 버리고 탈출했다. 바니 운전병은 하갈우리로 탈출 성공하여 페이스 중령의 시체가 있던 차량의 위치를 증언했는데, 그로부터 54년이 흘러 2004년 북미 합동 발굴단이 시신을 발굴했다.] 후동리에서는 중공군들은 저항이 없는 미군 차량 행렬을 돌아다니며, 부상병들을 일일이 쏴죽이고 모든 차량에 불을 질렀다. 일부 장교들은 지휘하기를 포기하고 숨거나 도주하였다. 이로써 페이스 부대는 와해되었다. 후동리까지 진입했던 육군은 크게 3가지 부류로 나뉘었는데, 첫 번째 부류가 가장 현명했다. 인사장교 로버트 존스 소령은 도로로 이동하는 것을 포기하고, 도로와 평행하게 놓여있던 철로로 진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호반과 너무 가까워서 위험했다. 차량행렬 중에 몇 대만이 존스 대위를 뒤따랐다. 이동 중 중공군에게 공격을 받기는 했지만 큰 문제없이 하갈우리 해병대 방어진지에 도착했다. 2번째 부류는 어떻게든 길을 따라 하갈우리로 이동한 병사들이었다. 페이스 대대 D중대 소대장 제임스 캠밸 중위는 낙오병들과 배수로를 기어 이동하다가 국군(?)을 만나 해병대가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국군이 도로를 가리키며 '미군 지프차들이 매일 저 길을 따라 내려갔다.'고 말했지만, 켐벨은 의심스러워 그냥 호숫가를 따라 걸어갔다. 3 km를 더 내려가 일행이 17명으로 늘어날 때 쯤 해병대 전차부대를 만난다. 다음날인 2일 밤에는 페이스 대대 임시 중대장 스미스 중위가 이끄는 무리나 D중대장 비거 대위가 이끄는 무리가 하갈우리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3일에 도착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가장 한심했던 3번째 부류는, 그냥 다 포기하고 풍유리강 하구와 후동리 사이에서 죽치고 앉아있던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얼어 죽거나 중공군의 포로가 된다. 12월 4일 콜세어기가 후동리 미군 차량대열을 폭파하기 위해 폭격을 했는데, 아직도 움직이는 미군들이 보였다. 이와는 별개로 후동리에 진입하기 전에 개별 도주한 병사들도 꽤 있었다. 이들은 끊어진 다리나 도로 장애물 등으로 이동로가 막히자, 도로에서 대기하다가 얼어붙은 호수 쪽으로 도주하였다. 주변에는 아무 장애물도 없었고 보름달 때문에 환해서, 중공군들이 사격하기에는 편했다. 어떠한 엄폐물 없이 외롭게 달려가던 병사들은 하나씩 사살되었다. 다행히 다음날인 2일에는 미 육군 격파를 완료한 중공군 80사단 병력이 남하하여, 장진호 동안에서는 비교적 손쉽게 개별 탈출이 진행되었다. 적어도 300명 이상이 개별적으로 호수를 넘어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개별 탈출은 해병대가 하갈우리에서 이동하기 전날인 12월 5일까지도 계속되었다. 당시 하갈우리 북쪽 호수 방면은 해병 수송대대가 방어하고 있었고 전면에는 [[지뢰]] 지대가 있었는데, '''너무 추워서 터지지 않는 바람에''' 육군 병사들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12월 4일 페이스 부대(32연대 1대대)의 생존자를 파악했을 때 전체 1,053명 중 17%(181명)만 살아 돌아왔다. 장진호 동안 육군 전체로 보면 하갈우리로 돌아온 총 인원은 약 1,900명 안쪽으로 병력 1,000여 명 이상이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어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